‘예능은 예능일 뿐!’...이종범 '예능귀순'의 교훈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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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OO이 사라진 시대, ‘스포츠스타에 끌린다’
쏟아지는 스포테이너와 스포츠예능은 사회현상
문제는 스포츠의 본질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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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의 야구 예능 '최강야구'의 홍보 포스터. 최강야구는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JTBC와 제작사인 스튜디오C1의 갈등으로 각각 최강야구와 불꽃야구로 갈라서게 됐다./ 최강야구 홈페이지 |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찾아보니 3년 전인 2022년 6월 19일로 나오네요. 당시 유튜브채널 ‘슈카월드’(현재 구독자 359만명)는 ‘예능은 왜 고령화되었나’라는 콘텐츠를 제작했습니다. TV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유재석 강호동 김구라 윤종신 서장훈 등 50대가 많고,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게 그 얼굴’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유는 TV시청자층이 고령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됐습니다. 이 현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더 심화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친분이 있는 한 예능PD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정게스트 중 절반 정도는 시청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해요.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면 공감이 쉽지 않고, 채널은 금방 돌아가거든요."
# TV시청자는 왜 고령화됐을까요? 우리네 삶의 변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방송가에서는 '2008년 이후 국민00(가수, 배우 등)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해는 바로 흔히들 ’모바일 혁명‘으로 불리는 스마트폰의 보급이 본격화됐습니다. 이후 15년이 흐르며 요즘 젊은층은 아예 TV 자체를 잘 보지 않게 됐습니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넷플릭스 등 OTT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찾아서 보죠.
젊은층뿐 아니라 중장년층의 TV이탈 현상도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니 전 국민이 아는 유명인(셀럽)이 새롭게 등장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미디어의 천국인 미국 등 전 세계가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는 케이블TV 선을 끊는다는 ’코드커팅(Cord-Cutting)'이 한창이고, 세계 최고의 뉴스채널로 불리던 CNN은 시청률이 반토막 이하로 떨어지는 등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죠. 모두 스티브 잡스가 현대인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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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슈카월드'의 '예능은 왜 고령화되었나' 편. 모바일 혁명 이후 미디어 소비 변화를 면밀히 분석한 콘텐츠다./슈카월드 썸네일 |
# 확실한 건 지금은 분야별 셀럽의 등장은 쉽지만, 한 나라의 국민 대다수가 알 만한 ‘국민OO'은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한 집에서 살면서도, 같은 직장 내에서도, 나이 성별 취미 등에 따라 관심이 가는 셀럽이 다른 겁니다. 여기서 스포츠를 보죠. 좀 특별합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스타플레이어는 단 기간에 폭발적으로 전 국민의 관심을 받습니다. 안세영 신유빈이 그렇습니다. 또 손흥민 이정후 박인비 등 세계 최고 무대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하는 슈퍼스타는 워낙 미디어 노출이 많아 인지도가 높습니다. 인기종목인 프로야구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수도 비슷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에서는 전국구 스타가 되는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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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야구는 2023년 일구상 시상식에서 수상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황영묵 정현수 고영우 등 최강야구 출신 프로선수들이 배출되기도 했다./뉴시스 |
# 이러니 예능계가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하려는 경향은 갈수록 짙어집니다. 시청자가 딱 보면 알거든요. 아예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강호동 서장훈을 필두로 격투기의 김동현 추성훈, 축구의 안정환, 골프의 박세리, e스포츠의 홍진호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스포테이너에는 은퇴 레전드는 물론, 좀 우려스럽지만 현역선수들까지 가세합니다. 여기에 아예 해당 종목 예능프로그램까지 줄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은퇴한 레전드급 선수나 지도자가 중심에 서고, 여기에 연예인이 가세합니다. 스포츠PD가 아닌 예능PD의 극적인 촬영 및 편집 효과를 곁들여 스포츠보다 더 스포츠다운 감동과 재미를 좇겠다는 겁니다. 대성공을 거둔 ‘최강야구’가 그렇고요, 축구의 ‘뭉쳐야 찬다’도 유명합니다. 포털 사이트에 ‘스포츠 예능’을 검색하면 이런 게 있어나 싶을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또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TV방송이 이러니 유튜브 등 OTT도 각종 스포츠예능으로 넘쳐납니다. 바야흐로 스포츠예능 시대인 겁니다.
# 스포츠예능이 인기를 끌면 해당종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지도자나 레슨 말고는 이렇다 할 은퇴 후 진로가 없었던 ‘선출’들에게도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도 하죠. 핵심은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능은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는 것이지 해당 종목의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거나,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제작진이 ‘임의로’ 출연자를 섭외해 만드는 '쇼'일 뿐입니다. 해당 종목의 본질이 발전하도록 노력해야지, 방송효과에 따른 인지도 상승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시적입니다. 본질을 해치면서 이루는 발전은 없습니다. 미국드라마 제목처럼 ‘하우스 오브 카드(사상누각)’인 것입니다.
KT의 이종범 코치가 최강야구 감독을 맡기 위해 시즌 도중 사표를 내 야구계에 충격을 던졌다. 사진은 지난 5월 23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키움 전을 지켜보고 있는 이종범 당시 코치의 모습./뉴시스 |
# 최근 발생한 이종범 사태가 스포츠의 본질을 훼손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현역 프로팀 코치가 ‘후배들을 위해’, ‘야구 발전을 위해’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시즌 중 사표를 내고 예능으로 건너갔습니다(정말은 자기를 위해서인데 말입니다). 이러면 최선을 다해 순위경쟁을 펼치고 있는 10개 구단의 선수와 지도자들은 뭐가 되는지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야인(野人) 때 하면 됩니다. 앞서 코치 경험이 없는 이승엽 전 두산 감독(6월 2일 자진사퇴)이 화려한 선수시절과 최강야구 인지도를 바탕으로 바로 프로팀 감독이 된 것도 문제였습니다. 힘들게 지도자 수업을 받을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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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스포츠 예능 '국대는 국대다'에서 이색 맞대결을 펼친 현정화 감독(왼쪽)과 서효원. 현 감독이 승리, 당시 탁구계에서 말이 많았다. l TV화면 캡처 |
#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예능의 스포츠 본질 훼손은 다른 종목에서도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난해 농구 레전드 현주엽은 고교 지도자와 방송활동을 겸하다가 구설에 오른 바 있습니다. 1990년 은퇴한 육상스타 장재근은 대표팀 지도자 제의를 받았지만 에어로빅과 쇼핑호스트로 잘나갔기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후 1998년 육상계로 돌아와 지도자와 진천선수촌장을 지냈습니다.
육상계가 필요로 할 때 수락했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22년 탁구에서는 레전드 감독(현정화)이 예능에서 제자인 현역 국가대표(서효원, 최근 은퇴)와 찐 맞대결을 펼쳤는데, 비록 1게임(세트)이지만 지도자가 선수를 이기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어쩌라고요? 50대중반의 현정화가 다시 태극마크를 달까요?) 또 대한탁구협회장(유승민)과 부회장(김택수)은 하필이면 프로탁구 챔피언 결정전 날 예능을 촬영했습니다. 탁구를 위해 촬영날짜를 변경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지상파 방송사의 스포츠국장을 지낸 선배가 이종범 사태를 접한 후 화를 누르며 연락을 해왔습니다. "(레전드들이)후진 양성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라나는 선수들한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다. 열심히 해 국위선양도 하고, 명예와 부도 얻었는데 결국에는 예능 프로에 나와 웃기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될까 우려스럽다."
이 선배의 엄중한 지적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레전드들도 경제적 문제 등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예능에 출연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스포츠예능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제발 예능이 스포츠의 본질을 훼손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작진이나 출연 레전드 모두 말입니다. ‘불충(슈카월드가 자주 쓰는 표현)’하게도, 예능은 예능일 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