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열풍과 '죽은 마라톤'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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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마라톤 시대! ‘러닝화 계급도’까지
엘리트 마라톤은 이봉주 후 극도로 침체
생체 위주 정책 탓은 근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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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마라톤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라톤 열풍이 뜨겁습니다. 사진은 지난 3월 2025 서울마라톤에서 참가자들이 힘차게 출발하는 장면. / 뉴시스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2025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마라톤(러닝)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한강 고수부지 등 주요 러닝 코스는 물론이고, 시내 중심가나 동네 등 장소불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달리기를 즐기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MZ세대가 주도하는 이 열풍은 생활체육 수준을 넘어 하나의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고, 경제적 효과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러닝 인구는 많게는 1000만 명,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각종 달리기 대회 참가자는 60% 이상이 20~30대의 젊은층입니다. 기업, 언론사, 지방정부 등이 경쟁적으로 달리기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는데, 못해도 국내에만 연간 400개가 넘습니다.

# 개성 넘치는 각양각색의 러닝 이벤트가 많은데, 인기 대회는 ‘오픈 런’을 해야할 정도입니다. 순위나 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를 추구하는 ‘펀런(Fun run)', 마라톤대회 출전과 여행을 함께 하는 ’런트립(Run trip)'과 같은 용어도 이미 보편화됐습니다. 고층빌딩을 오르는 ‘스카이런’, 애니메이션 캐릭터 분장의 달리기 이벤트(미니언즈런), 참가하면 주식을 주거나(키움런), 빵을 기부하는(빵빵런) 대회도 있습니다.

여기에 ‘닭강정런’과 ‘수육런’까지, 흥미로운 대회가 아주 많습니다. 또 여의도가 고구마를 닮았다고 해서 명명된 ‘고구마 런 코스’처럼 지역 특유의 달리기 코스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당연히 러닝화, 운동복 등 관련 용품시장도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러닝화의 브랜드와 모델의 성능, 가격, 용도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눈 ‘러닝화 계급도’가 나왔고, 족부 전문 정형외과 의사가 이런 논쟁에 가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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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러닝화 계급도'의 한 인기 버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다양한 형태의 러닝화 계급도를 쉽게 접할 수 있다. / 디시인사이드 러닝 갤러리 마르시

# MZ세대는 러닝 문화도 좀 특이합니다. 함께 달리는 ‘러닝 크루’가 핵심입니다. 기존 중장년층은 건강관리 차원에서 마라톤을 즐겼지만 MZ세대는 아예 달리기가 라이프스타일이 됐습니다. 달리기가 교제와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장기인 SNS까지 더해지니 인기폭발인 겁니다.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마라톤 열품은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점이죠.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마라톤 대회마다 젊은층이 몰리고 있고, 러닝 크루를 통한 이성교제가 보편화됐습니다. 이 때문에 데이트앱의 접속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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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충북 보은군 장안면 말티재 입구에서 정말이지 다양한 마라톤 대회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2025 속리산 힐링 알몸마라톤대회의 모습. 진짜 알몸은 아니고, 남성은 상의 탈의, 여성은 민소매가 ·규정이다. / 뉴시스

# 여기까지는 한국 마라톤의 밝은 사이드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축인 엘리트 마라톤은 정반대입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는 기준 기록(남자 2시간8분10초, 여자 2시간26분50초)을 통과한 선수가 없어 한국은 남녀 모두 출전 자체를 못했습니다. 이봉주가 2000년에 세운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은 25년이 넘도록 박제돼 있습니다. 가장 최근인 지난 9월 15일 도쿄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마라톤(0.03초차로 우승자가 결정돼 화제를 모았습니다)에서도 한국은 박민호가 출전했지만, 25㎞ 지점에서 기권(DNF)했습니다. 이러니 ‘죽어간다’, ‘암흑기’ 등의 자극적인 표현이 덧붙여집니다. 생활체육 마라톤 붐과 대조되니 더욱 암담해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손기정(1912~2002년)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 영화로도 제작된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그리고 황영조-이봉주의 시대까지 한때 마라톤 강국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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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초 차이' 탄자니아의 알폰소 필릭스 심부(왼쪽)가 지난 15일 2025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9분48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2위 아마날 페트로스(독일)도 같은 기록이지만 사진판독 결과 0.03초 뒤졌다. / AP뉴시스

# 이러니 케케 묵은 ‘생활체육 vs 엘리트 체육’ 이분법을 바탕으로 선동적인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체육정책이 생활체육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엘리트 체육이 망했고, 그 대표적인 게 마라톤이라는 논리입니다. 최근에도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는 생활체육 우선 정책으로 인해 학교체육이 무너진 게 ‘죽은 마라톤’의 원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금이라도 한국 마라톤을 살리기 위해서는 초중고 육상부를 되살리고, 엘리트 선수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전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 먼저 팩트체크입니다. 대한육상연맹에 문의했더니 최근 5년간 초중고 육상부의 숫자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보면 2023년 전국 78개 팀에서 2025년에는 83개팀으로 오히려 늘었습니다. 매년 소폭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학생 육상 선수의 숫자가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업팀 숫자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40~50개였는데, 2025년 현재 91개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질적으로도 한국은 체육 전문 중-고-대학이 있고, 대한체육회와 경기단체의 국가대표 및 꿈나무 지원시스템이 나쁘지 않습니다. 기초종목인 육상은 그 핵심에 있고, 마라톤은 한때 트랙과 필드 쪽이 ‘마라톤만 육상이냐? 왜 마라톤만 집중 지원하냐?’는 볼멘소리가 나왔을 정도로 집중투자가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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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광복 80주년 기념 제1회 천안독립기념관마라톤 대회에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운데)가 참가자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희귀병에서 벗어나고 있는 이봉주는 이날 5km 부문에 참석해 25분대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선수시절 이봉주는 5km를 평균 15분대에 주파했다. / 대회 조직위

# 한국의 엘리트 마라톤이 왜 이봉주 이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체육정책이 생활체육에 집중했고, 엘리트에 소홀했기에 양쪽의 명암이 갈린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활체육 마라톤 붐은 전 세계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이고, 엘리트 마라톤의 부진은 다른 곳에 있죠. 학교체육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 마라톤은 손기정-서윤복 이후 김완기-황영조-이봉주가 등장할 때까지 30년이 넘도록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그 시기는 혹자들이 말하는 학교체육의 전성기였는데도 말입니다. 삼성전자 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은 "마라톤 등 스포츠를 공적 시스템이 후원하는 것은 한국과 중국, 일본 정도가 뛰어나죠. 육상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 개인이 알아서 합니다. 학교체육 등 한국의 선수지원 시스템이 부족해서 엘리트 마라톤이 몰락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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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열풍을 이끌고 있는 젊은 세대는 혼자 뛰지 않는다. 친목과 이성교제, 자기표현이 달리기와 함께 이뤄지고 있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이런 문화를 다루기도 했다. 사진은 늦은 시간 여의도에서 열린 한 이벤트에서 참가자들이 준비운동을 하는 모습. / 뉴시스

# 마라톤뿐 아니라 골프(박세리와 세리키즈), 야구(박찬호 추신수 류현진), 축구(박지성 손흥민), 수영(박태환), 피겨스케이팅(김연아) 등 한 나라의 특정 종목 경쟁력에는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들)가 나와 시대를 호령했다가 다른 나라에서 좋은 선수가 나오면 그 자리를 내주는 겁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한국의 양궁, 중국의 탁구처럼 특정종목을 한 나라가 오랫동안 지배하는 것이 예외인 겁니다. 80억 명이 넘는 세계 인구에서 5166만 여 명의 한국은 0.63% 비중입니다. 면적은 0.067%입니다.

한국이 경제는 물론이고 스포츠 등 각종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쟁력을 보이는 것은 나름 잘 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한국이 주요 스포츠에서 늘 정상권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동북아프리카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마라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엘리트 마라톤이 어려울 때 나타난 '젊은 마라톤 열풍'은 반가운 일입니다. 저변이 확대되고, 지도자와 선수들이 분발한다면 엘리트 마라톤 중흥도 빨라질 겁니다. 두 사실을 무리하게 엮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억지논리를 만들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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