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 최초' 박찬호부터 '월클'손흥민까지...미국?보름달에?담긴?'30년 변화'[황덕준의?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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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가 1995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미국 무대를 두드린 지 30년 만에 손흥민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거쳐 '월클' 스타로 MLS 무대를 강타하며 한국 교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있다./LAFC

[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뒤쫓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파견된 1995년. 집을 임대하고 거기에 채울 냉장고와 TV 등 가재도구를 장만하러 코리아타운의 양판점에 갔다. 당시 서울에선 일본제 '소니'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회사에서 챙겨준 정착금이 나름 두둑해 한국의 봉급으로는 언감생심이던 소니 TV와 미제 제너럴 일렉트릭 냉장고를 구입했다.

매장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 잘 보이지도 않는 선반에서 '대우(Daewoo)'로고가 박힌 비디오재생기(VCR)를 발견했다. 일본과 미국 제품에 밀려 먼지까지 뒤집어 쓴 그 대우VCR이 반갑고도 안쓰러워 냉큼 카트에 실었다. 의류매장에서는 티셔츠 목덜미에 '메이드 인 코리아'가 박혀 있는 라벨을 보고 또 울컥했다. 한국제품이 '무려' 미국까지 와 있다는 느낌은 거의 경이로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아이는 어느날 점심 도시락으로 싸준 김밥을 고스란히 남겨왔다. "이제부터 김밥 안 먹을 거야"라고 소리지르며 엄마 치마자락을 잡고 칭얼댔다. 달래서 물어보니 학급 미국아이들이 김밥 냄새가 지독하다며 코를 싸쥐었다는 거다.

2025년의 오늘. 소니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삼성과 LG가 전자제품 매장을 장악하고 있다. 티셔츠에는 메이드인 차이나 아니면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에서 만들었다는 표시 뿐이다. 김밥은 미국 사회의 식료품 매장에서 핫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대형소매체인 코스트코는 자기네 프라이빗브랜드(PB)로 한국에서 주문자생산한 김을 산처럼 쌓아놓고 팔아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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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왼쪽)가 2016년 10월 스카이72골프장에서 은퇴식을 가진 뒤 박찬호의 격려를 받고 있다. 박세리는 아시아 최초의 LPGA 명예의 전당 헌액자다./하나금융그룹

30년 전만 해도 '한국 최초'는 우리 모두를 감격하게 만들었다. 박찬호가 그랬고, 박세리가 LPGA 무대에서 맨발 투혼으로 우승했을 때, 최경주가 한국 최초의 PGA투어 우승컵을 차지했을 때, 김연아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추신수가 한국인 타자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생애에서 이뤄지지 않을 거라 여겼던 일들이 특히 스포츠에서 '최초'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스포츠 뉴스가 아니라 '한국 최초'의 역사였다. 우리는 환호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나아가 더이상 '최초'라는 수식어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최고 수준인 '월드클래스'를 따진다.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휘젓고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를 뒤집어 놓고 있는 손흥민은 '최초'라는 흥분이 아닌 '월클'의 품격과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스포츠 뿐인가. K-팝은 세계 대중문화의 주류로 자리했다. BTS는 빌보드 차트를 장악하고,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 서며 팝 음악의 중심을 흔들었다. 블랙핑크는 세계적인 음악축제 코첼라의 메인 스테이지를 휩쓸었고, 뉴욕·런던·파리 어디에서나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이 등장했다. K-팝은 더 이상 아시아 팬덤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 세계 청소년들의 일상 언어이며, 글로벌 음악 산업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오랜 벽을 무너뜨렸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에서 수억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으며 넷플릭스 사상 가장 큰 성공으로 기록됐다.

K-콘텐츠는 낯선 아시아 작품이 아니라, 세계가 기다리고 소비하는 주류 장르로 진입했다. 뉴욕과 LA의 서점에는 한국 웹툰 번역본이 진열되고, 미국 대학 강의실에는 K-드라마를 연구하는 수업이 개설되고 있다. 클래식계에서 세계 피아니스트의 쌍벽으로 자리한 조성진과 임윤찬은 협연자로 이름만 올리면 콘서트 티켓이 매진된다. 한 강 작가가 풀어버린 노벨문학상의 숙원은 다른 분야의 수상으로 확장되리라는 기대감을 충만시킨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다 보면 그저 딱 네글자 '격세지감'이 떠오를 뿐이다. '최초'라는 단어에 열광하던 시절은 사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필요로 했던 때였을 게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이미 '하고 있다'의 시대에 들어섰다. 문화와 스포츠에서 한국은 더 이상 도전자나 이방인이 아니다. 주류의 중심에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는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이다.

'월드클래스'라는 이름은 순간의 영광이 아니다.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눈은 높아졌고, 기대 또한 커졌다. 이제는 단순한 성과를 넘어, 얼마나 오래 정상을 지키고 더 넓게 확장할 수 있느냐가 과제가 된다.

미국의 동포 사회가 느끼는 자부심도 여기에서 다시 출발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미국 땅에서 한국의 문화와 스포츠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그것을 통해 정체성을 키워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K'는 단순한 국가 브랜드가 아니라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생각이다. '한국 최초'의 시대에서 '월드클래스'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여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끈기와 열정, 그리고 세대를 이어온 꿈이 만들어낸 결과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유난히 커보이는 미국의 한가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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